Ferdinand Roybet (페르디낭 루아베)

그는 우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페와 리큐어 제조회사의 주인이었다.

그는 Ecole nationale des beaux-arts de Lyon에서 판화를 공부하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1863년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가서 장 조르주스 비버트와 함께 공부하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올드 마스터스를 베꼈다.

1865년 약간의 재정난 끝에 살롱에서 그림 두 점을 선보였고, 이듬해 마틸드 보나파르트가 작품 한 점을 5,000프랑에 사들임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대부분 18세기부터 유행한 수치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연봉 2만 5천 프랑으로 매달 세 권의 캔버스에 대한 계약서를 받았다.

파리 공성전에 이어 벨기에와 알제리를 방문하며 장기간 여행에 나섰다.

귀국하자마자 자신이 창작한 작품들을 1만 프랑에 팔고, 저택에 정착하여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졌고 그의 저택은 채권자들에게 압류당했다.

그는 1893년 명예의 군단에 기사로 임명되었고 그의 고객들 중에는 많은 부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는 1893년 팔레 드 르인더리(Palais de l'Industriesrie)에서 그의 작품 중 하나에 10만 프랑을 지불했다.

그는 또한 로버트 드 몽테스키우 백작, 헨리에트 푸앵카레 부인, 조셉 갈리에니 장군 등 시대별 의상을 입고 있는 많은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그렸다.

1920년 4월 11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종교적인 주제로 눈을 돌렸으며, 그리스도의 정열을 묘사한 22점의 그림으로 된 탁자를 제작했다.

그가 죽은 후, 1921년, 그들은 살롱에서 특별한 쇼의 대상이 되었다.

6년 후, 코르베보이에 로이베트의 그림을 다수 소장한 콘수엘로 파울드에 의해 뮤제 로이베트 파울드가 설립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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