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nardo Strozzi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베르나르도 스트로치(Bernardo Strozzi)는 1581년 이탈리아 제노바(Genoa)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트로치는 1595년에서 1597년 사이 제노바에 있던 시에나 화가 피에트로 소리(Pietro Sorri)의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1599년 그는 카푸친 수도회(Capuchin)에 들어갔고 제노베세 일 카푸치노(Genovese il Capucino)라는 필명을 받았다. 1609년 어머니의 병환 치료와 미혼의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이 시기부터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프레스코화, 초상화, 종교 제단화, 장르화를 그렸고, 작품 판매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초기 그림은 페데리코 바로치(Federigo Barocci)와 시에나의 거장들, 특히 프란체스코 바니(Francesco Vanni)와 매너리즘 화가들의 것과 유사하다. 1620년경 스트로치가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와 그의 추종자들의 더 자연주의적인 화풍을 선택하면서 그의 작품에서 매너리즘 요소는 점차 사라졌다. 그는 카라바조처럼 종교화의 주인공들을 세속적인 인물로 바꾸어 그렸고 배경과 인물 간의 명암 대조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외에도 루벤스(Rubens)나 제노바에서 활동한 플랑드르 화가들의 양식을 수용하여 주문자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화풍을 구사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는 1620년경 팔라초 두칼레(Palazzo Ducale)를 위해 그린 '정의의 여신의 성모 마리아'(La Madone de la Justice, 17세기경), 1623년부터 1625년 사이에 루이지 센추리온(Luigi Centurione)의 저택을 위해 그린 프레스코화, 센추리온의 궁전을 위해 계획한 미완성의 장식화가 있다.

그는 1620년대까지 독립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1630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산 바나바(San Barnaba)의 형제들로부터 수도회에 다시 입단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스트로치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의 수사신부가 되라는 그의 요청을 거부하여 수도회에 끌려갔다. 수도회는 그가 신성성에 불명예를 끼쳤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스트로치가 초상화나 풍속화와 같은 세속적인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한 징계로 추정된다. 로마 교황청과 제노바 지역의 원로원의 중재로부터 스트로치는 안전을 보장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옥되었다.

1632년에서 1633년 사이 그는 베네치아로 넘어가 2년 만에 예하(Monsignor)라는 칭호로 불릴 만큼 존경받은 자리에 올랐다. 여기서 그는 베네치아의 총독 프란체스코 에리즈조(Francesco Erizzo), 추기경 페데리코 발디세라 바르톨로메오 코르나로(Federico Baldissera Bartolomeo Cornaro), 그리마니 가문(Grimani) 그리고 줄리아 몬테베르디(Giulio Monteverdi), 바바라 스트로치(Barbara Strozzi)와 같은 음악가, 시인들에게까지 후원을 받았고, 이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또한 그는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Biblioteca Marciana)의 우의화 제작을 맡았고, 토렌티노 산 니콜라스 교회(Chiesa di San Nicola da Tolentino)와 데글리 인큐라빌리 성당(Chiesa degli Incurabili)을 위한 제단화를 그렸다. 그는 자신의 조수들과 대규모 워크샵을 열면서 화풍을 전수했고 1644년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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