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ward Stott (에드워드 스톳)
에드워드 스톳(Edward Stott)은 1859년 영국 잉글랜드의 북서부에 위치한 로치데일(Rochdale)에서 태어났다. 제분소를 운영하던 스톳의 아버지는 그에게 가업을 물려받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883년 신원 미상의 후원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스톳은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파리로 넘어갔다. 그는 파리에서 카를로스 듀란(Carolus-Duran)의 아틀리에에 들어갔고, 이후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의 후원을 받아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했다.
이 시기 파리 예술계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스톳 역시 이들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상주의란 1860년경 파리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새롭게 등장한 미술 양식이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은 캔버스에 실제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자신이 본 대상을 작업실에서 정확한 구도와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비추어 순간적으로 달라지는 대상의 색채, 이 때 느끼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그림에 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은 야외에 이젤을 놓고 그리는 사생을 선택했고 다양한 색채와 물감의 질감을 사용하여 특정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회화를 그렸다.
스톳은 이러한 화가 중에서도 쥘 바스티앙 레파주(Jules Bastien-Lepage)와 함께 지내며 그의 화풍에 영감을 받았다. 레파주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영향을 받아 전원 풍경, 나무, 짚 더미 등을 사실적이고 담백하게 그린 화가이다. 스톳은 루앙(Rouen)에 있는 레파주의 작업실에 찾아가 그를 만났고, 레파주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조지 클라우슨(George Clausen), 스탠호프 포브스(Stanhope Forbes), 헨리 허버트 라 생(Henry Herbert La Thangue)과 함께 프랑스 시골 지역을 자주 방문했고, 여러 지역 중 퐁텐블로(Fontainebleau) 근처의 그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작업하는 것을 무척 즐겼다.
스톳은 초반에는 레파주와 유사한 자연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점차 인상주의로 화풍을 확장했다. 그는 시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의 시골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야외에서 캔버스에 바로 그림을 그리진 않았지만 연필, 분필, 파스텔로 스케치를 했고 하루하루의 날씨, 빛, 색을 노트에 기록하여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활용했다.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살롱전(Salon)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1883년에는 그의 작품이 최소 1점은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에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스톳은 프랑스 시골과 비슷한 교외 지역을 찾았다. 처음에는 아일랜드 화가 월터 오스본(Walter Osborne)과 함께 우스터셔(Worcestershire)의 이브샴(Evesham)으로 갔고 그 다음에는 워웰(Wherwell)의 햄프셔 마을(Hampshire village)로 갔다. 그의 작품 중 '나룻배'(The ferry, 1887년경)는 이 시기 즈음 사생 방식으로 그린 전원 풍경화이다. 이 그림은 할아버지와 그의 손녀와 손자로 보이는 아이 셋이 풀이 우거진 강에서 배를 타고 있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비평가 스탠리(J. Stanley Little)는 스톳의 그림을 '녹색과 회색이 조화롭고, 푸르른 강가와 붉은색 농가가 대조를 이룬 화면'이라 호평하기도 했다.
스톳은 1886년 보수적인 화풍에 반발한 화가들과 함께 신영국미술협회(New English Art Club)를 설립했고, 1889 년에는 영국 서식스 주(Sussex)의 앰벌리(Amberley)에 정착했다. 1896 년 스탠리가 '스톳은 앰벌리의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다양한 측면으로 연구했으며, 이를 통해 앰벌리의 정신적 본질까지 작품 속에 담아냈다. 그곳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앰벌리를 가장 아름답고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스톳은 이 지역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역 주민, 동물 등을 풍경에 끌어들였고, 이전에 비해 파스텔톤의 색채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는 물감을 얇게 여러 층으로 덧칠하여 화면에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고, 작렬하는 태양 빛이 아닌 이른 아침의 햇살 또는 저녁의 달빛을 연상시키는 빛을 표현했다.
또한 종교적인 주제들을 그리되 일상과 성스러움의 경계에 위치하게끔 묘사했다. 예를 들면, 자연주의적인 풍경에 양떼를 기르거나 수확을 하거나 빨래를 너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평범하면서도 종교적 의미가 깃든 화면을 그렸다. 그는 마침내 1906 년에 로열 아카데미 준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918 년 앰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영국에서 여러 미술 학도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유언장에도 로열 아카데미의 미대생들에게 여행 장학금을 후원한다고 적혀 있어 사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의 명화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06월 21일) 오늘의 명화산책. (0) | 2023.06.21 |
---|---|
(2023년 06월 20일) 오늘의 명화산책. (0) | 2023.06.20 |
(2023년 06월 18일) 오늘의 명화산책. (0) | 2023.06.18 |
(2023년 06월 17일) 오늘의 명화산책. (0) | 2023.06.17 |
(2023년 06월 16일) 오늘의 명화산책. (0) | 2023.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