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so Cano (안론소 카노)

알론소 카노(Alonso Cano)는 1601년 스페인 남부 지중해 연안의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다. 제단화 설계자인 아버지 미구엘 카노(Miguel Cano)로부터 제단화와 관련된 건축적 요소를 배웠고, 1614년 세비야로 이주한 뒤에는 마르티네스 몬타녜스(Juan de Martínez Montañés) 밑에서 조각을 배웠다. 또한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의 작업장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와 함께 회화를 공부했다.

1637년 카노는 벨라스케스의 초대를 받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그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Felipe Ⅳ)의 궁정에서 벨라스케스의 조수이자 회화 복원가로, 또 빛의 종교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남성 누드를 소재로 한 회화가 여전히 인기가 있었던 상황에서, 카노는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피에타 같은 장면을 즐겨 그렸다. 특히 그는 남성 누드를 표현하는 데에도 고전적이며 섬세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카노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17세기 거의 모든 유명 화가들의 종교화에서 보이는 극적이고 과장된 표현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극적인 요소들을 완화시키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을 취해 묘사하면서 작품 전체에 우아함과 고요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그는 고도의 정확성을 요하는 해부학 드로잉 및 고전주의 누드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를 뛰어난 조각가로 만들어주는 데에도 유용했다.

카노는 ‘스페인의 미켈란젤로’로 불릴 만큼 회화와 조각, 건축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재능을 보인 예술가였지만, 분방하고 절제되지 못한 기질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 그는 1644년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되자 마드리드를 떠나 스페인 동부의 발렌시아로 도주했다. 이 사건으로 그의 궁정 화가로서의 경력은 심한 타격을 받았다. 발렌시아에서 일정 기간을 보낸 그는 펠리페 4세에게 간청하여 마드리드로 돌아왔으나 인기는 이미 식은 뒤였다.

1652년 카노는 고향인 그라나다로 와서 그라나다 대성당의 파사드 장식에 착수했다. 그는 1658년에 그라나다의 성직자로 책봉되었으며, 그라나다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그가 생애 마지막 해에 완성한 그라나다 대성당의 파사드는 스페인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풍부한 장식과 강한 형태의 대조를 특징으로 하는 이 건축물에서 더 이상 고전 건축의 도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이후 스페인의 바로크 건축은 17세기 말까지 매우 자연스럽게 번성할 수 있었다. 그라나다 대성당 안에는 그가 제작한 다수의 회화 작품과 조각품도 남아 있다. 카노는 166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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