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ond Marie Petitjean (에드몽 마리 쁘띠장)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그의 예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법을 공부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를 파리로 보내 공증인의 도제가 되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박물관을 방문했고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재정적 지원을 끊었지만, 그는 낸시의 작은 공장을 관리하는 직업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필요한 용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1874년 살롱 데 아테네스 프랑수아즈에서 첫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1881년 살롱에서 명예로운 상장을 받았고, 2년 후 회원이 되었다.

1884년 1등 훈장과 1885년 2등 훈장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대서양 연안의 여러 항구에서 그림을 그리고 1년을 도드레히트에서 일하면서 보냈다.

그는 박람회 (1889년)에서 장식하는 데 참여하였고 은메달을 수여받았다.

이듬해 뮌헨에서 전시했다.

1892년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00년에 그와 다른 20명의 화가들은 스테판 아돌프 데르빌레, 파리 체민스 드 페르 드 프랑스 이사회 회장으로부터 "르 트레인 블루"로 알려진 가레 드 리옹의 레스토랑을 장식하는 위촉장을 받았다.

그는 '살레도레'(골든룸)에서 일하게 되어 지중해 연안을 주제로 하여 르 푸이 마을을 묘사한 장면을 그렸다.

1904년에 화가인 Jeanne Laubvernay와 결혼했는데,

그는 31세 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국제적으로 전시하였으며, 1909년 알래스카-유콘-태평양 박람회에서 은메달을 수여받았다.

전체적으로 거의 800여 점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 동안 많은 화가들이 그랬듯이, 그는 또한 정기 간행물을 위한 삽화와 만화를 그렸는데,

특히 풍자적인 저널인 르 프라우,

라쉬에트 아우 부레와 르 리르를 포함했다.

*출처 : 위키백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