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02일) 오늘의 명화산책.
Carolus-Duran (카롤루스 뒤랑)
카롤루스 뒤랑(Carolus-Duran)은 1837년 프랑스 릴(Lille)에서 여관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뒤랑의 본명은 찰스 아우구스트 에밀 뒤랑(Charles Auguste Émile Durand)이었는데 카롤루스 뒤랑이라는 필명이 생긴 뒤로는 필명만 줄곧 사용하였다. 그는 릴 아카데미(Academy of Lille)에서 조각가 장 바피스트 카데 드 보프레(Jean-Baptiste Cadet de Beaupré, 1758~1823)의 제자로 회화와 조각을 배운 후, 2년 동안 프랑스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 제자였던 화가 프랑수아 소우송(François Souchon, 1787~1857)의 작업 스튜디오에서 견습생으로 근무하며 미술 훈련을 받았다. 뒤랑은 1853년에 파리로 이주하였고 본격적인 화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859년부터 1861년까지 스위스 아카데미(Swiss Academy)의 과정을 따랐다. 그 당시에 만났던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사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받은 뒤랑은 인상주의 등장에 발판을 마련하였던 화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 펠릭스 브라커몬드(Félix Bracquemond, 1833~1914), 재커리 아스트루크(Zacharie Astruc, 1833~1907)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가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한 것도 1859년이었다.
1862년부터 1866년까지 뒤랑는 지역 장학금을 받아 로마와 스페인으로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큰 영감을 받았고 쿠르베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페인 바로크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élasquez, 1599~1660)의 작품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랜드 투어를 마친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1866년 파리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받았다. 1867년에 그는 9명으로 구성된 일본 징글라 협회(Japanese Jinglar Society)의 회원이 되었으며 그 회원으로는 팡탱-라투르, 브라커몬드, 도예가 마크 루이스 솔론(Marc-Louis Solon, 1835~1913) 등이 있다. 1868년에 뒤랑은 파스텔리스트이자 미니어처리스트인 폴린 크로이제트(Pauline Croizette, 1839~1912)와 결혼했고 그들은 슬하에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갑 낀 여인, 카롤루스 뒤랑 부인'(La Dame au gant. Mme Carolus-Duran, 1869년)이 미술계의 큰 호평을 받았고 1870년부터 뒤랑은 본격적으로 초상화 제작에 전념했다. 그는 빠르게 성공하였고 파리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 개인 작업 스튜디오를 열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아서 제자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1872년에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군단 기사 작위(Knight of the Legion of Honor)를 받았으며 1878년엔 장교(Officer), 1889년엔 사령관(Commander), 1900년엔 최고 장교(Grand Officer)로 승진하며 꾸준한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1889년부터 1900년까지 그는 파리 만국박람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는 1890년에 미국미술협회를 창립하였으며 1904년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05년에 그는 로마의 아카데미 드 프랑스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화가이자 미술 교육자로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에 큰 영향을 준 뒤랑은 1917년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