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29일) 오늘의 명화산책.
Caravaggio (카라바조)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정서불안에서 비롯된 제멋대로인 성격과 천부적인 재능, 선술집에서의 폭음과 격렬한 싸움, 그리고 많은 빚과 음침한 친구들,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들 중 한 명이다. 그의 회화 양식은 부분적으로 서툴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티가 났지만, 카라바조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신하고 강력하며 대담한 자연주의로 채워,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 결과 '카라바지스티(Caravaggisti)'라고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에서 생겨났다.
소년 시절에 살던 도시의 이름을 따서 카라바조라고 불린 그는 건축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젊었을 때 죽었다. 활동 초기, 카라바조가 베네치아와 크레모나, 밀라노, 볼로냐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고아였고 빚을 진 상태였다.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베네치아풍의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하게 되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수수께끼 같은 초상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자화상 <병든 바쿠스>(1593~1594경)가 있다. 이 작품은 인물뿐만 아니라 정물에도 뛰어난 그의 특별한 재능을 보여준다.
1600년에 카라바조는 많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순수주의자들은 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캔버스에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매장>(1602~1603)과 같은 종교화들을 주문받아 제작했는데, 이 중 일부는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강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을 사용한 그의 독창적인 표현법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1606년 카라바조는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 도주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의 주문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인 듯하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마로 가던 길에,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그는 몰랐지만, 사면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