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07일) 오늘의 명화산책.
Antonio Pisanello (안토니오 피사넬로)
작은 키에서 유래된 피사넬로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안토니오 디 푸치오 피사노는 1395년경에 이탈리아의 피사 Pisa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베로나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그는 베로나의 산 비질리오 술 라고(San Vigilio sul Lago)에 1415년 경까지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15년부터 1420년에는 국제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로 잘 알려진 젠틸레 다 파브리노(Gentile da Fabrino, 1370년경 – 1427년)의 조수로 일하며, 세련된 스타일을 익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오늘날에는 소실된 프레스코화의 작업을 함께 하였다. 카스텔베키오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메추라기의 성모: 성모와 두 천사와 메추라기(Madonna della Quaglia , 1420년 경)'에서는 젠틸레 다 파브리노의 영향이 드러나며, 또한 스테파노 다 베로나(Stefano da Verona 혹은 da Zevio, 1379 – 1438)의 스타일이 녹아있음을 확인한 몇몇의 학자들은 피사넬로가 그의 제자이기도 하였음을 입증하는 작품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피사넬로는 1422년에 당시 13세였던 루도비코 곤차가(Ludovico Ⅲ Gonzaga, 1412 - 1478)를 위해 처음 작업한 이래로 1440년대까지 곤차가 가를 위해 꾸준히 일했다. 만토바 Mantova에서 일하던 그는 다시 베로나로 돌아와 후기 고딕 양식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공주(San Giorgio e la principessa, 1436년~1455년)'를 그렸다. 이 작품에는 젠틸레 다 파브리노의 팔라 스트로치(Pala Strozzi, 1423)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색상과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젠틸레 다 파브리노는 성 요한 라테란 성당(Santissimo Salvatore e Santi Giovanni Battista ed Evangelista in Laterano)에서의 작업을 미완인 채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피사넬로는 그의 유언에 따라 1431년부터 1432년까지 프레스코 화의 나머지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는 로마에 머물며 르네상스 미술의 많은 영향을 받고, 고전적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그는 프레스코화 이외에도 동적인 순간을 포착한 스케치와, 정적인 물체를 세밀하게 연구한 다양한 그림들을 남기기도 했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코덱스 발라디 Codex Vallardi)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피사넬로는 기념 메달의 창시자로, 생전에는 메달 제작자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메달은 다음 세대가 모방하였으며, 메달에 있어서 주류적 양식이 피사넬로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메달 예술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피사넬로가 본격적으로 메달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의 메달은 일반 화폐처럼 주조되었다. 피사넬로는 메달 주조 방식을 청동 부조 그림처럼 바꾸었으며, 인물을 새긴 메달과 초상 회화를 같은 가치로 생각했던 그는 자신이 작업한 메달에 Opus Pisani pictoris (화가 피사노의 작품)라는 사인을 넣었다. 그는 메달의 뒷면에 우화의 이미지를 넣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실리아 곤차가 메달의 메달 뒷면에는 공녀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유니콘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그는 1448년 12월 이후에는 나폴리에서 말년을 보냈는데, 1449년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은 끊어졌으며, 아마도 1455 년 10 월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한 곳은 나폴리인지 로마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