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5월 27일) 오늘의 명화산책
Adrian Ludwig Richter(아드리안 루드비히 리히터)
아드리안 루드비히 리히터, 혹은 루드비히 리히터는 독일 드레스덴(Dresden)에서 판화가인 칼 아우구스트 리히터(Carl August Richter, 1770-1848)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드비히 리히터는 어릴때부터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며 판화, 동판화는 물론 드로잉 등 미술에 대한 기초를 익혀가다,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Hochschule für Bildende Künste Dresden)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은 리히터는 1820년부터 러시아의 귀족인 나리쉬킨(Naryshkin) 공작의 삽화가로 임명 받아 그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떠난다.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곧 이탈리아로의 유학을 결정, 이 여행에서 요제프 안톤 코흐(Joseph Anton Koch, 1768-1839) ,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 , 칼 바그너(Carl Wagner, 1796-1867) 및 프레드리히 루드비히 폰 마이델(Friedrich Ludwig von Maydell, 1795-1846) 등의 예술가들은 물론 외교관, 철학자, 그리고 신학자까지 만나 교류하면서 그의 예술과 철학에 대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학 이후 1827년 독일로 돌아와 마이센 (Meißen)의 시립미술학교에서 드로잉 교수로 재직하며 풍경화와 목판화 작품활동을 지속한다.
1836년 리히터는 그의 아버지가 재직했던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의 풍경화 교사로 임명 받아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150권이 넘는 책의 삽화를 작업하는 등 본인의 작업 역시 활발하게 진행하며, 1853년에 뮌헨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München), 그리고 1874년에는 베를린 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의 명예회원으로 위촉 되는 등 큰 인정을 받게된다. 그러나 1873년부터 발생한 안과 질환으로 리히터는 76년 교편을 내려놓고 은퇴하게 되었고, 그의 고향이자 작업장이였던 드레스덴에서 1884년 80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 졌고, 현재 그의 묘지는 드레스덴의 신가톨릭묘지(Neuer Katholischer Friedhof)에 있다.
루드비히 리히터는 당대의 유명한 판화가이자 드레스덴 미술학교의 교사였던 아버지로 인해 어릴적 부터 미술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공방에서 직접 판화를 배우며 조각사가 될 준비를 했다. 그의 첫 판매 작품이었던 동판화 작품은 그의 아버지와의 공동작업이였다, 그러나 리히터는 목판화 드로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뮌헨의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드로잉에 대한 것을 배우며, 풍경화에 매료되었다. 그는 17살에 나리쉬킨 공작과 한 여행에서 멋진 삽화들을 많이 그렸고, 이때부터 그의 예술가로서의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다.
이 후 이탈리아로의 여행에서 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립했고 '나그네들이 쉬고 있는 이탈리아 풍경 (Italienische Landschaft mit ruhenden Wandersleuten, 1833)' 와 같이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풍부한 색감의 목가적인 풍경화에 대한 화풍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여행 이후 드레스덴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고향인 독일의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작업에 헌신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는 중 라이프치히의 출판사인 게오르그 비간트(Georg Wigand)에서 '그림과 아름다운 독일(Das malerische und romantische Deutschland)'의 삽화를 요청했다. 이 책을 위해 그는 '슈레켄슈타인 연안에서의 도하(Überfahrt am Schreckenstein, 1837)'를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붉은 노을과 슈레켄슈타인의 기암괴석을 신비하면서도 낭만적으로 표현하며 독일의 자연에 대한 그의 뛰어난 관찰과 애정을 보여준다.
이 작업 이후 리히터는 삽화 작업의 의뢰를 많이 진행하게 되는데, 인쇄를 위한 목판 작업을 진행한다. 그는 괴테의 시집, 독일의 민요나, 시는 물론 그림형제의 이야기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작업을 했는데, 그 많은 작품 중 1842년 요한 카를 아우구스트 무새우스(Johann Karl August Musäus, 1735-1787)의 '독일 민속이야기(Volksmährchen der Deutschen)'에 대한 삽화 작업은 그의 대표작이자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동화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의 삽화는 단순하고 명확한 구성에, 유머와 아름다움을 녹여낸 것이 특징이다. 그의 삽화는 페인팅에 밀려 쇠퇴하던 독일의 판화 예술의 부활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독일의 목판 기술을 한층 끌어 올렸다고 평가된다.
그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1855)에 유화 작품 '봄날의 결혼식 행렬 (Brautzug im Frühling, 1847)'을 출품하여 매달을 수상 하는 등 페인팅 작품도 여전히 인정받으며 그의 예술적 업적을 쌓았다. 리히터가 안타깝게 안과 질환으로 붓을 놓기 전까지 약 삼천여점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제작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