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명화산책

(2023년 06월 25일) 오늘의 명화산책.

디자이너 아재 2023. 6. 25. 08:00

El Greco (엘 그레코)

엘 그레코는 생전에 놀라운 독창성을 인정받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친 사람 또는 심각한 시각 장애자로 여겨졌다. 그의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과 악몽에나 나올법한 기괴한 색채 감각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에 엘 그레코의 진기하고 선구적인 재능은 재평가 받게 되었다.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의 별명인 '엘 그레코'는 '그리스인'이라는 뜻으로, 크레타 섬에서 온 그의 출신을 나타낸다.

그리스 정교를 믿던 그의 가족들은 무역업 및 크레타 섬을 관리하는 베네치아 행정 기관의 공무원 등으로 일했다. 그의 가족에게 교활한 거래는 낯설지 않았고 법적인 언쟁은 엘 그레코의 삶의 특징으로 남았다. 그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웠으며,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작품들을 가능한 한 비싼 가격에 팔고자 했던 야심에 찬 남자였다.

엘 그레코는 1563년에 독립 화가가 되었고, 1560년대 중반까지 크레타 섬에 머무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567년경에 베네치아로 가서 1570년까지 머물렀고, 티치아노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베네치아 시기 동안에 그레코는 크레타 섬에서 몰두했던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났다.

<수태고지>(1560년대)에서 볼 수 있듯이 화풍이 느슨해졌고, 형태와 공간, 그리고 운동감을 창조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570년부터 1577년까지 로마에서 지냈고, 공간, 색채, 역동적인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실험하던 자신의 회화에 로마의 역사성을 더했다.

엘 그레코는 1577년부터 1614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의 주요 도시인 톨레도에서 지내며 전성기를 맞았다. 1578년에 그는 동료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지만 그녀와 결혼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톨레도에서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1586~1588)을 포함하여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제작해나갔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 행을 택한 데는 당시 스페인의 통치자였던 펠리페 2세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한몫했던 것 같다. 그의 이러한 기대는 현실이 되었으나 그는 썩 만족할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대신 엘 그레코는 1590년대에 수많은 중요한 종교화들을 주문 받았고, 또한 초상화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톨레도를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거의 추상적인 작품인 <톨레도의 풍경>(1610경)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당시에 점점 더 자유롭게 회화에 접근했으며, 이는 수많은 근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목자들의 경배>(1612~1614)와 같은 작품은 선명한 색채와 길쭉한 형상이 특징이며, 이 때문에 그레코는 흔히 마니에리스모 화가로 분류되었다. 또한, <목자들의 경배>는 스페인 반종교개혁 운동의 열풍과 조화를 이룬 영적인 황홀경을 보여주었다. 엘 그레코가 개인적으로 반종교개혁 운동의 열풍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많은 근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더니즘의 초석이 된 작품들 중 하나인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은 <성 요한의 계시>(1608~1614경)로도 알려진 엘 그레코의 비범한 작품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에서 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엘 그레코를 유명하게 만든 특징들이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엘 그레코는 선명한 적갈색과 계시적인 하늘, 극도로 왜곡된 형태, 추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공간감과 원근감 등으로 극단적 상황을 표현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던 친구인, 화가 이그나시오 술로아가의 파리에 있는 집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