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08일) 오늘의 명화산책.
Edgar Degas (에드가 드가) PART 1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는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 그는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조각뿐만 아니라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진술에도 정통했다. 드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자식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려 집안에 작업실을 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1855년에 앵그르를 만났는데, 그는 드가에게 "선에 충실하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드가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고 이후 이탈리아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1865년에는 파리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드가는 무명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는데, 이 협회는 1874년부터 계속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첫 번째 협회전에는 드가,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나중에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이 전시회에 대해 야유 섞인 의미로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불충분한 세부묘사와 두드러진 붓질, 색을 혼합하지 않고 사용하는 등의 회화양식 때문이었다.
드가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화랑 주인 폴 뒤랑 뤼엘은 드가가 활동하는 내내 그를 후원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1880년에 색다른 시점의 구도와 자유롭고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밀랍 모형(이후 청동으로 주조됨)에 다른 요소들인 실제 천으로 만든 발레용 치마, 인형 머리카락, 새틴 리본 등을 결합하여 만든 그의 걸작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1880~1881경)에 대해서는 열광, 분노, 혐오감 등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다.
1886년에 드가의 작품들이 뉴욕에서 전시되었고, 1905년에는 런던에서 드가와 다수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어느 정도 여성혐오증이 있었고, 여자보다는 자신의 미술 세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드가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대다수는 여성 무용수, 여성 세탁부, 재봉사와 같은 여성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말년에 드가는 시력이 나빠졌으나,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능력은 그럭저럭 계속 유지해나갔다.
드가는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을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식과 인상주의 미술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그는 "내가 정부라면 야외에서 실물을 직접 보며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감시할 특수 경찰부대를 조직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외광회화'를 비판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도 휘말렸다. 이 사건은 유대인 군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잘못 기소 당했고, 드레퓌스의 지지자와 반대파 간의 논쟁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었던 사건이다. 드가는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주장하여 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결국 그는 많은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을 잃게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